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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키워드로 살펴본 수원삼성 20주년

2015.12.15 | VIEW : 3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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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년 이야기
수원삼성이 달려온 20년, 수원삼성의 20년을 함께한 사람들, 20주년에 대한 축하와 새로운 기대들. 수원삼성블루윙즈가 지난 20년 동안 팬들과 함께 만들어온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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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 키워드로 살펴본 수원삼성 20년


“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라운드의 쿠데타”(1996년 11월 4일 경향신문) 수원삼성블루윙즈는 첫 출발부터 달랐다.
불과 한 시즌을 치른 초년병에게 쏟아진 찬사와 환호는 K리그 최초로 팬들과 함께 호흡한 첫 구단을 향한 기대감이었다. 팬들의 기대와 지지, 열정과 함성을 뒷심으로 삼은 수원삼성은 수많은 레전드들과 22개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감동적인 드라마를 써왔다. 수원삼성이 지나온 20년을 10개의 키워드로 살펴봤다.


| 1 | 우리가 가야 길이 된다


결국 명문 클럽은 사랑하는 팬들에 의해 창조된다. 그런 면에서 수원삼성은 선구자였다. 창단 열흘 후 사이버윙즈로 출범한 수원삼성 서포터즈는 그랑블루라는 이름으로 K리그 응원문화를 선도했다. 치어리더와 매스게임에 익숙하던 한국에서 수원삼성이 펼친 유럽식 서포팅은 화제였다. 당시 KBS는 그랑블루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만큼 수원삼성의 응원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였다.

창단 멤버였던 고종수 코치의 회고담이다. “어느 날 골대 뒷편에 서너명의 팬들이 몰려와 북을 치고 응원을 시작했어요. 우리와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는 게 신기하더군요. 50명, 100명 하루가 다르게 서포터들이 늘어나더니 어느새 골대 뒷편 좌석을 가득 메웠습니다. 나는 K리그의 응원문화를 새롭게 바꾼 자랑스러운 팬들과 함께 커왔죠.” 그랑블루에 영향을 받은 다른 구단들도 서포터즈가 조직됐지만, 수원삼성을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원삼성은 일본과 유럽 응원가를 베껴 부르던 것을 넘어 고유 응원가를 만들었다. K리그 최초로 변환 카드섹션를 시도하는 등 카드섹션 응원문화를 통해 색다른 볼거리도 제공했다. 특히 2007년 8월 빅버드에서 펼쳐진 ‘축구수도’ 카드 섹션은 수원이 한국축구의 메카이자 축구수도임을 선포하며 ‘우리가 가야 길이 된다’는 선구자 정신을 일깨웠다.


| 2 | 차원이 다른 챔피언


김호 감독은 입버릇처럼 “수원삼성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리그 전체 분위기를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생팀 수원삼성이 명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우승이 절대요소였지만 그보다 수준 높은 세련된 축구가 우선돼야만 했다.


수원삼성의 축구는 달랐다. 단조롭고 거칠기만 했던 한국축구에 다채로운 전술과 공간의 미학을 살린 차원 높은 축구를 선보였다. 창단 첫해 30만 관중을 넘어선 이유다. ‘수원삼성 축구는 달라! 재미있어!’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수원종합운동장은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했다. 홈경기 날이면 미처 예매를 못한 팬들이 표를 사기 위해 경기장을 몇 바퀴 휘감으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2011년 5월 축구전문지 <베스트일레븐>과 네이버가 공동으로 조사한 ‘K리그 역대 최고의 팀’ 설문에서 ‘고데로 트리오’(고종수-데니스-산드로)가 활약한 2001년 수원삼성과 전관왕을 차지했던 1999년 수원삼성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한 것만 봐도 수원삼성 왕조의 화려함을 알 수 있다. 창단 5년 만에 이루겠다던 K리그 우승은 단 3년 만에 이룬 이후 수원삼성은 국내외 22개 대회를 석권하며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클럽으로 성장했다.


| 3 | Top of Asia


1999년 K리그 전관왕을 차지한 수원삼성은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1997년 아시안컵위너스컵(現 AFC챔피언스리그 통합)에서 아쉽게 준우승을 거뒀던 수원삼성의 목표는 아시안클럽챔피언십(現 AFC챔피언스리그)였다.
2001년 5월 26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주빌로 이와타(일본)와 결승에서 맞붙었다. 이전 두 차례 맞대결에서 2전 전패로 열세에 있었지만 수원삼성 팬들의 함성 가득한 홈에서는 달랐다. 산드로의 결승골에 힘입어 1-0 승리를 거두며 우승했다. 8월에 벌어진 아시안슈퍼컵에서는 알 샤밥 (사우디아라비아)을 1승 1무로 누르고 명실상부한 아시아 챔피언에 올랐다. (※ 당시는 아시안클럽챔피언십과 아시안컵위너스컵 챔피언이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슈퍼컵을 치러 챔피언을 가렸다.)
2002년 4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아클럽챔피언십에서는 1.5군을 출전시키는 여유 속에서도 안양LG를 승부차기로 누르고 대회 2연패를 차지했다. 알 힐랄(사우디아라비아)과의 슈퍼컵마저 2연패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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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클럽으로는 최초로 아시안클럽챔피언십과 슈퍼컵을 모두 2연패한 수원삼성은 ‘Top of Asia’의 명성을 떨쳤다. 당시 FIFA 마케팅 대행사 ISL의 부도로 인해 FIFA 세계클럽월드컵 출전이 두 차례 모두 무산된 것이 옥의 티였다.

‘Top of Asia’의 명성은 아시안클럽대항전 성적을 봐도 여실히 증명된다. 수원삼성은 창단 이후 아시안클럽대항전에서 70.1%의 승률(46승16무 15패)을 기록했다. 특히 1997년부터 2011년까지 이어간 27경기 홈무패 (22승 5무)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 홈무패 기록은 2011년 알사드의 비매너 경기로 깨졌다.) IFFHS(세계축구역사통계연맹)는 2011년 21세기 아시아 최고 클럽 순위를 발표하며 수원삼성을 6위에 올려놓았다.


| 4 | 명장


수원삼성의 전통은 명장들로부터 만들어졌다. 초대 감독이었던 김호 감독의 방 안에는 브라질, 이탈리아, 스페인, 잉글랜드에서 공수한 축구 비디오가 가득했다. 새벽녘이 될 때까지 비디오를 보며 새 전술을 구상하다 보니 침대보다는 소파에서 쪼그려 잠들기 일쑤였다. ‘왜 편한 침대를 놔두고 소파에서 자느냐’는 질문에 ‘내가 편하면 나태해질까 봐 그렇다’고 답하던 그는 축구만을 생각하던 ‘외곬’이었다. 마치 가시가 많은 나무에 누워 자고 쓰디쓴 곰 쓸개를 핥으며 승리를 갈구했던 오왕 부차처럼…. 그는 자신의 방을 ‘축구 감옥’이라고 불렀지만, 그 속에서 축구를 논하고, 고민하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독일 유학시절 공부해온 선진 시스템을 접목시킨 훈련 스케줄은 체계적이었고 코칭스태프 미팅, 훈련장비 체크에 이르기까지 제반 준비가 꼼꼼했다. 연습 경기를 할 때도 코치를 미리 경기장으로 보내 잔디 종류와 길이를 체크할 만큼 철저했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수원삼성의 중앙수비수로 98경기(7골 2도움)를 뛰었던 코스민 올라오유(올리·2015년 아시안컵 사우디아라비아대표팀 감독)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수원삼성을 위해서 70분 동안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나머지 20분은 김호 감독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었다. 그 분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은인이다. 김 감독은 감독이기 전에 좋은 사람이었다. 그와 4년 동안 생활하면서 선수들에게 감정을 섞어 화내는 것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선수에게 기술보다 태도를 중시했다. 내가 감독을 하면서 하고 있는 모든 방식과 행동들은 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차범근 감독이 2대 수원삼성 지휘봉을 잡았다는 소식은 그의 세계적인 명성만큼이나 화제를 모았다. 차 감독은 부임 첫해 포항과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는다. 대한민국 최고의 GK 이운재와 김병지의 대결답게 1,2차전에다 연장전까지 210분간 0-0 공방을 펼쳤다. 공교롭게도 포항의 마지막 키커로 나선 김병지의 킥을 이운재가 선방으로 막아내며 끝난 승부차기 드라마의 승자는 차 감독이었다. 지도자 인생에서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린 차 감독은 수원삼성에게 세 번째 K리그 우승을 안겼다. 2004년 우승을 거둔 수원삼성은 2005년 A3대회를 비롯한 컵대회마저 석권했다. 당시 소설가 고원정 씨는 2005년 2월 22일자 경향신문 <스포츠광장> 칼럼에서 “시즌 전관왕을 노린다는 목표가 더 이상 욕심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수원삼성의 전력은 막강했다. 나는 레알 수원삼성이 더 막강해지기를 바란다”고 썼다.


차범근 감독의 지도철학은 ‘얼음론’으로 압축된다. 그는 평소 “한 번의 추위에 언 빙판은 쉽게 녹고 맙니다. 겨우내 한파를 모두 견뎌낸 얼음만이 봄바람이 불어도 한동안 견뎌내죠. 단단한 얼음판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2008년 챔피언결정전은 더욱 극적이었다. 숙적 FC서울과의 맞대결이었다. 원정 1차전 1-1 무승부를 거둔 후 맞이한 빅버드에서 치른 2차전. 2-1 승리와 더불어 우승을 확정 짓던 그 순간, 하늘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차 감독은 “독일에서 축구감독은 손끝 감각을 갖고 한다는 말이 있다. 이제 조금씩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손끝감각(Fingerspitzengefuhl)은 동물적인 예미한
통찰력과 감각을 뜻하는 말이었다. 차 감독의 손끝 감각은 2차례 K리그 챔피언과 2차례 리그컵 우승, A3대회와 팬퍼시픽대회 우승으로 이끌며 6년 6개월만에 마감됐다. 수원삼성은 20년간 단 4명의 지도자만이 지휘봉을 잡았다. 한번 믿고 맡기면 자신의 역량을 펼칠 때까지 기회를 준다는 수원삼성만의 철학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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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스타, 레전드


잘 알려진 스타들과 레전드들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수원삼성에는 그들 외에도 클럽과 팬에 대한 충성심과 헌신을 보여준 숨어있는 스타들 또한 많다. 우선 윤성효(現 부산 감독)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다른 팀에서 이적해온 노장들과 신인선수들이 혼재하며 규율조차 없던 창단 초기 악역을 도맡았다. ‘방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혹독하게 후배들을 단련한 그의 헌신은 수원삼성이 빨리 정착하는 데 절대적이었다.


이병근(現 수원삼성 수석코치)가 주장을 맡고 있던 2004년 포항전.공중볼을 경합하다 상대 머리와 부딪혀 정신을 잃고 그대로 필드에 내리꽂혔다. 하마터면 목뼈가 부러질 뻔한 위기상황이었다. 병원으로 향하던 앰뷸런스에서 정신을 차린 그의 한 마디는 “난 뛰어야 한다. 경기장으로 가자”는 말이었다.

김대의(現 매탄고 감독)의 일화다. 2009년 성남일화와 FA컵 결승전 때 경기 시작하자마자 오른발을 접질렸다. 발을 내딛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는 의무팀에 “압박붕대로 동여 매달라”고 부탁한 후 끝까지 뛰었다. 연장이 끝난 후 승부차기에서 여유 있게 칩샷으로 성공한 그는 우승을 확정하고 난 후에야 필드에 쓰러졌다. 압박붕대를 푼 그의 발은 시커멓게 부어올라 마치 돌덩이 같았다. 보는 이들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부상이 심했음에도 그는 웃고 있었다. 그는 “문득 내가 수원삼성에서 뛸 수 있는 마지막 경기가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뛰어야 했고, 무조건 우승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외국인 선수들의 헌신도 잊을 수 없다. 올리는 외국인임에도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합숙을 자청할 만큼 팀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했다. 수원삼성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것 같은 투쟁심을 보여줬던 리웨이펑과 스테보도 빼놓을 수 없다.


| 6 |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


수원삼성이 20년간 만들어낸 문화적인 산물들은 한국 사회 내부에도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붉은악마마저 단순한 팬클럽으로 평가 받기 일쑤였던 그 당시 ‘서포터즈’라는 용어를 한국 사회에 대중화시킨 주역은 수원삼성의 응원문화였다. 그랑블루는 2002년 한일월드컵의 붉은악마보다 3년 앞선 1999년 K리그에서 처음으로 카드섹션을 선보이며 서포터즈를 전 국민에게 알렸다.대한민국 공식 응원이 된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역시 수원삼성 응원문화의 걸작이었다. 당시 붉은악마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하던 수원삼성 서포터들이 ‘수원삼성’ 구호를 변형시켜 만든 작품이었다. 팬들이 직접 제작한 응원 앨범이 3집까지 발매된 구단 역시 수원삼성이 유일하다. 특히 대한민국 대표 록밴드 노브레인이 헌정한 ‘나의 사랑, 나의 수원’은 수원삼성의 클럽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1999년 코리아컵 때 일화다. 당시만 해도 국가대표팀조차 전문적인 키트매니저를 두지 않다보니 유니폼 관리도 대표 선수들의 몫이었다. 수원삼성은 창단부터 유럽의 시스템을 받아들여 전문적인 스태프가 체계적으로 관리해왔다. 당시 국가대표에 소집된 고종수는 수원삼성 시스템에 익숙했던 탓에 경기 당일 유니폼을 챙겨가지 않았다. 고종수 해프닝으로 인해 대표팀에도 전문적인 키트매니저가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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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라이벌


수원삼성의 20년간 얽히고 설킨 라이벌과 악연들은 K리그 스토리텔링의 자양분이었다. 특히 수원삼성 왕조 시절 수원삼성을 ‘공적(公敵)’으로 삼았던 수많은 팀들과 쌓은 구원들은 세월과 스토리가 쌓이며 라이벌 구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창단 초기에는 무엇보다 울산현대가 격파 1순위였다. 공교롭게도 수원삼성의 창단 첫 경기 상대가 울산이었다. 박건하의 2골로 2-0 승리를 거두며 창단 첫 승리를 챙겼지만 1996년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역전패를 당했다. 수원삼성은 2년 후 챔피언결정전에서 울산과 다시 만나 억울했던 준우승의 아픔을 설욕하며 첫 우승의 제물로 삼았다.


다음 타깃은 전통명가인 부산대우와 포항스틸러스였다. 안정환, 김주성 등 기라성 같은 스타가 즐비했던 부산을 상대로 수원삼성은 1999년 대한화재컵과 K리그 결승전에서 맞붙어 모두 우승을 거머쥔다. 또한 포항은 2002년 FA컵 결승전과 2004년 챔피언결정전에서 잇따라 누르며 명문 도약의 발판을 삼는다.


수원삼성의 라이벌 역사의 백미는 ‘지지대 더비’다. 1999년 3월 20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수원삼성과 안양의 슈퍼컵 경기가 열렸다. 서정원은 이 경기에서 처음으로 수원삼성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하필이면 상대가 전 소속팀 안양이었다.


이때부터 수원삼성과 안양의 라이벌전이 시작됐다. 감독 사이의 악연에 재계 라이벌, 이웃하고 있는 지리적인 위치, 앙숙인 서포터들의 요소가 더해져 라이벌 관계에 불이 붙었다. 수원삼성은 이 경기에서 안양을 5-1로 꺾었다.


지지대더비는 안양의 서울 연고 이전으로 사라졌다. 수원삼성은 안양FC가 창단하던 2013년 이전까지 ‘북벌’이라는 이름으로 FC서울과 대리전을 펼쳤다. 슈퍼매치로 이름 붙은 수원삼성-서울 맞대결은 FIFA가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 8 | 드라마


1994년 9월 창단 발표부터 이미 드라마의 시작이었다. 2002 월드컵 유치를 간절히 바라던 국내 여론은 삼성전자의 K리그 참여를 환영했지만 축구계 내부에서는 텃세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100억 원의 축구발전기금을 내놓으라는 으름장은 시작일 뿐이었다. 1996년 개막 이틀 전 발전기금을 완납 안 하면 리그에 불참시키겠다는 억지를 이겨내고 천신만고 끝에 리그에 참여했다. 첫 시즌 수원삼성에게 닥친 운명은 신생팀에게 우승을 내줄 수는 없다는 이상한 논리였다.


1996년 후기리그 무패를 달리고 있던 수원삼성은 포항원정에서 몰수패를 당했다. 당시 외국인 선수 보유규정(4명 보유, 3명 출전)을 어기고 외국인 선수 4명을 출전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FIFA 규정대로라면 해당 선수를 퇴장시키고 경기를 진행시켜야 했지만 수원삼성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수패를 당해야 했다.


1996년 챔피언결정전에서 억울하게 준우승을 거둔 것이 오히려 수원삼성 역사에는 긍정적인 드라마였다. 온갖 역경을 헤쳐나오려는 노력에 팬들의 마음은 수원삼성으로 향했다.


수원삼성을 떠나는 창단 감독을 향한 5,000개의 푸른색 종이비행기, 위암 기라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수원삼성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빅버드를 찾은 신인기 씨를 위해 에두가 보여준 골뒤풀이는 K리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힌다. 한 달 후 작고한 신인기 씨를 기리기 위해 수원삼성 구단은 매년 ‘신인기 포토제닉’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팬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진행한 신문 광고도 화제였다. 상대 팬에게 모욕적인 언사로 큰 상처를 받았던 안정환을 위한 광고와 수원삼성을 떠나는 차범근 감독에게 감사를 표한 신문광고는 짜릿한 드라마로 남아있다.


수원삼성이 써온 명승부의 역사도 빼놓을 수 없다. 1999년 8월 25일 포항과 홈경기에서 전반 초반 내리 3골을 내준 후 4골을 뽑아내며 4-3 역전승을 거둔 승부는 K리그 역사에 남을 대역전극으로 꼽힌다. 당시 김호 감독은 “25년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뻤던 승리다. 3골을 내줬지만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에겐 가장 큰 힘이었다. 축구란 이런 것이다”고 소감을 밝혔다.


단 12분간 6골을 주고받는 난타전 끝에 5-4 승리를 거뒀던 지지대 더비의 짜릿한 승리(2000년 4월 9일)도 잊을 수 없다. 2003년 10월 8일 나드손의 연속골로 2-1 역전승을 거둔 지지대 더비 승리는 이 날 경기가 마지막 지지대 더비였기에 가슴에 남아있다.


첫 아시아챔피언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2001년 5월 피루지를 상대로 거둔 역전승 등 수원삼성은 20년간 수많은 빅버드 극장을 선사해왔다.


전남으로 이적한 이운재를 빅버드에서 처음으로 적으로 맞이했던 2011년 5월. 비록 팀을 떠났지만 레전드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준비한 111초 기립박수와 연패의 늪에 빠져있던 수원삼성에게 힘을 주기 위해 서포터석을 찾아 함께 응원한 김호 감독의 사랑은 수원삼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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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새로운 미래 ‘유스 시스템’


수원삼성 유스 시스템의 출발은 늦었다. 2007년 보급반인 리틀윙즈를 창설한 것으로 시작으로 2008년 매탄고(U-18) 창단, 2010년 매탄중 (U-15) 창단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2013년 U-12팀과 U-10팀이 만들어지면서 피라미드가 완성됐다.


짧은 역사에도 수원삼성 유스의 업적은 놀랍다. 매탄고는 2010년과 2012년 챌린지리그를 우승한 데 이어 2013년에는 전국체전을 제패했다. 매탄중은 2014년 중등주말리그 왕중왕전 챔피언에 오른 데 이어 2015년 춘계연맹전 왕중왕을 차지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컵 출전자격을 따냈다. 수원삼성 유스는 명실상부한 전국 최강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육성철학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지도와 지원 시스템 덕분이다. 수원삼성은 탄탄한 기본기와 상대를 압도하는 기술(Skill),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Mentality), 배려와 동료애, 존경심을 갖춘 인간미(Humanity) 등 육성철학에 맞게 선수들을 길러내고 있다. 연령별 대표팀마다 많은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고, 민상기(2011년)에 이어 권창훈, 연제민, 박용준(2013년) 등 FIFA U-20 월드컵마다 대표를 배출해오고 있다. 지난해 권창훈이 수원삼성 유스 출신으로는 최초로 국가대표팀에 발을 들여놓았다.


수원삼성은 빅버드의 새로운 레전드가 될 새로운 미래의 양성뿐 아니라 ‘한국축구에 기여하는 구단’이라는 창단 이념에 맞는 선수들을 길러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10 | 또 다른 꿈 ‘Home of Football’


정조대왕은 ‘아름다움은 적을 두렵게 한다’는 철학을 담아 수원 화성을 건립했다. 수원삼성은 화성이 완공된 지 정확히 200년이 되던 1996년 출범한 클럽이다. 지난 20년 수원삼성은 수원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쉼 없이 달려왔다.


성인이 된 수원삼성은 새로운 도전에 나서려 한다. 새롭게 제정한 슬로건 ‘Home of Football’에는 축구수도의 자부심을 담았다. 아울러 최고가 되자는 목표와 레전드를 직접 길러내자는 철학이 녹아 있다. ‘Home of Football’ 기치 아래 수원삼성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명문을 넘어 위대함을 꿈꾸는 새 역사를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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