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수문장 김대환,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
2004.10.2712470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결코 놓지 않겠다는 김대환 골키퍼/스포츠인터렉티브
“운재형과의 경쟁 의식을 갖기보다 장점을 빨리 배우고 싶다.”
“골키퍼는 실력 뿐 아니라 운도 따르기 마련이다. 조바심을 가지면 내가 망가진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한 두 번 기회는 오는데 그 때 나 때문에 팀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각오로 생활한다. 그런 기회에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감독이 예쁘게 봐서 한 경기 더 뛰게 해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기회만 주어지면 결과로 능력을 입증한 수원의 수퍼 서브 김대환 골키퍼. 올시즌 정규리그에서 단 2경기에 출전했지만 모두 무실점 승리를 견인했다. 특히 팀이 선두권에 진입하느냐 하위로 추락하느냐의 고비였던 울산전과 부산전 2경기에서의 무실점 활약은 팀과 수원팬들에게 김대환의 존재 가치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김대환 골키퍼와의 일문일답이다.
볼에 대한 독점욕으로 시작된 골키퍼
-축구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4년 때 포항 영흥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가 포철동초등학교로 전학했고 포철중학교와 포항제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밖으로 다니지 않고 매일 집에만 있으니까 어머니가 축구를 권유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시작했는데 운동을 하다보니 재미가 느껴져 계속하게 되었다. 3일 정도 축구를 해보고 골키퍼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포지션 특성상 혼자 공을 잡을 수 있어서 좋았다. 친구들과의 경쟁 의식도 작용했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는데 할수록 실력이 늘어 주위에서도 인정을 받아 운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주전 골키퍼로 활약할 수 있었고.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1학년 때 외에는 계속 주전이었고 고등학교 때에도 1학년 때를 제외하고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다. 대학교 때는 1학년 때부터 계속 주전이었다.
-백치수 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한다고 말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중 3 때 코치 선생님으로 오셔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인격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양대로 진학할 당시 백치수 선생님이 한양여대 감독으로 계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첫 제자라서 내게 애착이 갔는지 수시로 밥도 사주고 용돈을 주기도 하셨다.
평소 생활에서 백 선생님의 자신있는 모습이 좋았다. 강해야 할 때는 강하고 부드러워야 할 때는 부드러울 줄 아는 분이었다. 중학교 때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이 교장에게 가서 원하는 유니폼 구입을 당당하게 요구하면서 “학교 재정으로 안된다면 내 월급에서 빼라”고 말하는 남자다운 모습이 멋있었다. 나도 성격적으로 영향을 받아 그 이후 비슷하게 닮아갔다. 중 3 때 인간 김대환의 성격이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축구 선수로서의 목표는 무엇인가?
항상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말 열심히 준비한다. 언제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자신의 목표에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도달했다기 보다 배우려고 노력한다.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나라는 사람을 알리고 싶고 잘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다고 자신한다. 29살이지만 아직도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고 군대 다녀온 후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운재형과의 경쟁 의식을 갖기보다 장점을 빨리 배우고 싶다. 운재형이 말을 툭툭 내뱉는 스타일이지만 편하게 잘해준다. 올해는 최고참 선수 위치여서 그런지 운동하면서 나의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바로 지적해준다. “야 그거 발 잘못 됐다. 이렇게 해라”하는 식이다. 자그마한 차이가 골키퍼의 실력을 좌우하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된다.
운재 형에게 많은 걸 배우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골키퍼는 포지션 특성상 실력이 거의 비슷해도 순간적인 판단이나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잘하는 선수와 못하는 선수가 구별되는데 운재형은 전체적으로 잔 실수가 없고 침착하며 경기 운영 능력이 뛰어나 좋은 모범이 된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
사실 지금이 가장 힘들다. 골키퍼는 실전에서 실력이 많이 늘기 때문에 게임을 많이 할수록 기량이 좋아진다. 그러나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교체할 필요가 거의 없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엄청난 노력을 하는데 그만큼 인정받지 못할 때, 나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상대가 더 잘할 때, 내가 아무리 잘해도 상대가 더 잘 할 때면 안타깝고 아쉽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골키퍼는 그 팀에서 가장 잘 하는 사람이 출장하는 것 아닌가.
-팬북에서는 대학 2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되어 있던데.
대학교 때는 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운동이 너무 잘되니 심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사춘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 때 사춘기였나보다.
-선수 생활을 하다보면 위기의 때도 있는데.
군대 갔다가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을 했을 때이다. 골키퍼는 팔을 완전히 쭉 뻗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동작을 반복하다가 뼈가 닳아 그 부분을 수술을 통해 잘라냈다. 수술 후 재활 훈련하고 회복하는 일년 동안 몸무게가 30킬로그램이나 불어 충격을 받았다. 그 때“이제 축구 그만둬야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되겠다 싶어 육개월 동안 열심히 훈련해서 20킬로그램을 뺐다.
하지만 군 제대 후 수원으로 복귀했는데 내가 없던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밑에 있던 광수가 너무 잘하고 위로는 운재 형과 범철이 형이 있고. 나는 공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운동하다 중간에 구석에 가서 내가 운동을 그만둬야 하나보다 생각했다. 가장 열심히 하던 기간이기도 했지만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 6개월 동안 힘들게 운동하면서 중간중간 그라운드 구석에 가서 축구 그만둬야 되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 후 몸이 되돌아오고 코치가 가르치는 것을 몸이 받아들이게 되면서 덜 힘들어졌다.
-U-18 대표 선수로 선발된 경험도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인 92년에 18세 학생대표에 선발되어서 아시아학생선수권에서 입상했던 적이 있다. 대회 기간 동안 친구랑 한 게임씩 나눠서 골키퍼로 뛰었다. 그 때 동기는 지금 축구 안하게 되었지만. 당시 서동원, 안정환, 이상헌이 동기로 함께 학생대회 출전했었다. 대학교 2년 때에도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었는데 2달 동안 훈련하다가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하고 나왔다. 당시 팀에 골키퍼로는 이운재, 서동명이 있었다.
-아직도 대표팀 욕심이 있겠다.
기회가 되면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있는 것 아닌가. 나도 월드컵대회에 뛰고 싶다.
-골키퍼가 아니었으면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있었다는 아쉬움이 들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지 않다. 골키퍼가 아니었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 같다. 경기할 때는 필드 플레이어들에게 많이 뛸 것을 요구하는 편이지만 막상 훈련시 미니 게임을 하면서 필드 플레이로 나서면 정말 힘들고 어렵더라. 골키퍼가 천직이라 생각한다. 골키퍼만큼 재미있는 포지션이 없다. 공을 막으면서 하늘을 난다는 느낌도 들고 공이 손에 딱 잡힐 때 기분은 너무 좋다.
기다리면 때는 온다
-수원에 입단하게 된 계기는?
당시는 드래프트로 입단하게 되어 있어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었다. 영선이가 드래프트 1순위였고 내가 2순위로 입단하게 되었다. 사실 수원에는 골키퍼 자원이 너무 많아서 오고 싶지 않았다. 박철우, 이운재,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용병, 광수, 그리고 그 외에 2명이 더 있었다.
당시 골키퍼 전력이 약한 전북, 대전, 부산 같은 뛸 수 있는 팀에 가고 싶었다. 지금 말한 팀 드래프트 상황을 신문사를 통해 알아보니 1, 2차 어디에도 없어 떨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수원 입단을 희망했던 친구(대전의 강정운)가 수원 드래프트 상황을 알아보다 되었다고 알려줬다.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지만 대학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많이 설레었다.
-98년에 입단했으면 중견고참인데.
현재 팀 내에서 내 위로 형들이 없다. 수원의 분위기가 나이 어리나 많으나 상관없이 제 일만 잘하면 되는 분위기이지만 내가 처음 입단하던 시절에는 형들하고 눈도 못 마주쳤다. 지금은 열일곱살짜리 아이들도 서정원 선생님과 농담을 하는 정도이니 분위기도 많이 변한 것 같다. 내가 입단할 때 윤성효 선생님이 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때 볼보이하면서 아저씨라고 불렀던 분이었다. 입단 후 형이라고 부를 수도 형님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호칭을 정하지 못해 고민했던 생각이 난다. 차범근 감독님이 오시면서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지금은 선후배가 친구처럼 지낸다.
-수원은 각급 대표팀에 뛰었던 선수도 선발로 출장하지 못할 만큼 선수층이 두텁다. 골키퍼의 경우는 특수한 포지션이어서 교체도 힘들다. 특히 국가대표 이운재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선발로 출장해 케이리그 출전 기회가 많지 않다. 힘들지 않은가?
욕심은 크게 없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한 두 번 기회는 오는데 그 때 나 때문에 팀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각오로 생활한다. 그런 기회에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감독이 예쁘게 봐서 한 경기 더 뛰게 해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한 게임 뛰게 해줄 때마다 정말 목숨 건다는 생각 밖에 없다.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내가 뛸 때 이겨야 한다 생각도 강하다. 올 시즌 5승 6무, 7실점 했다. 벤치에서 게임을 볼 때도, 준비할 때도 늘 팀과 함께 한다는 생각이다. 연습할 때는 더 열심히 해서 게임을 뛰면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몸에 익히려 노력한다.
-전후기 정규리그 합해서 2번 선발 출장했다. 출전 기회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원으로서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해 중요한 고비였던 지난 울산전, 원정이었던 부산전에서 멋진 선방으로 모두 무실점 승리를 챙겼다. 실전에서 뛰지 않으면 경기 감각이 많이 떨어진다고 말했는데, 멋진 활약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진다는 생각은 안해봤고 이긴다는 자신감 때문에 이긴 것 같다. 개인적으로 준비도 많이 했다. 운재형의 대표팀 스케줄이 나와 있어서 한 달 전부터 그 게임에 맞춰 준비를 했다.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훈련했다.
자신 있게 경기에 임할 수 있는 비결은 배짱인 것 같다. 수원에 입단한지 벌써 7년째다. 내가 나가서 지면 어떡하지 하면서 긴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믿고 열심히 한다. 내가 먹는 골은 남들도 먹는 것이고, 남이 먹는 골을 나는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만큼 준비를 하니까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무모할 정도로 배짱이 있다. 경기장 밖에서는 그렇지 않다. 남들이 얼굴만 봐도 피하니까. 운전하다 시비를 가리는 상황이 되어도 창문 열고 “죄송하다” 그러면 상대가 바로 “아무것도 아니다”며 그냥 간다(웃음)
“골키퍼는 실력 뿐 아니라 운도 따르기 마련이다. 조바심을 가지면 내가 망가진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한 두 번 기회는 오는데 그 때 나 때문에 팀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각오로 생활한다. 그런 기회에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감독이 예쁘게 봐서 한 경기 더 뛰게 해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기회만 주어지면 결과로 능력을 입증한 수원의 수퍼 서브 김대환 골키퍼. 올시즌 정규리그에서 단 2경기에 출전했지만 모두 무실점 승리를 견인했다. 특히 팀이 선두권에 진입하느냐 하위로 추락하느냐의 고비였던 울산전과 부산전 2경기에서의 무실점 활약은 팀과 수원팬들에게 김대환의 존재 가치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김대환 골키퍼와의 일문일답이다.
볼에 대한 독점욕으로 시작된 골키퍼
-축구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4년 때 포항 영흥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가 포철동초등학교로 전학했고 포철중학교와 포항제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밖으로 다니지 않고 매일 집에만 있으니까 어머니가 축구를 권유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시작했는데 운동을 하다보니 재미가 느껴져 계속하게 되었다. 3일 정도 축구를 해보고 골키퍼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포지션 특성상 혼자 공을 잡을 수 있어서 좋았다. 친구들과의 경쟁 의식도 작용했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는데 할수록 실력이 늘어 주위에서도 인정을 받아 운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주전 골키퍼로 활약할 수 있었고.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1학년 때 외에는 계속 주전이었고 고등학교 때에도 1학년 때를 제외하고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다. 대학교 때는 1학년 때부터 계속 주전이었다.
-백치수 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한다고 말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중 3 때 코치 선생님으로 오셔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는데 인격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양대로 진학할 당시 백치수 선생님이 한양여대 감독으로 계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첫 제자라서 내게 애착이 갔는지 수시로 밥도 사주고 용돈을 주기도 하셨다.
평소 생활에서 백 선생님의 자신있는 모습이 좋았다. 강해야 할 때는 강하고 부드러워야 할 때는 부드러울 줄 아는 분이었다. 중학교 때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이 교장에게 가서 원하는 유니폼 구입을 당당하게 요구하면서 “학교 재정으로 안된다면 내 월급에서 빼라”고 말하는 남자다운 모습이 멋있었다. 나도 성격적으로 영향을 받아 그 이후 비슷하게 닮아갔다. 중 3 때 인간 김대환의 성격이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축구 선수로서의 목표는 무엇인가?
항상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말 열심히 준비한다. 언제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자신의 목표에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도달했다기 보다 배우려고 노력한다.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나라는 사람을 알리고 싶고 잘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다고 자신한다. 29살이지만 아직도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고 군대 다녀온 후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운재형과의 경쟁 의식을 갖기보다 장점을 빨리 배우고 싶다. 운재형이 말을 툭툭 내뱉는 스타일이지만 편하게 잘해준다. 올해는 최고참 선수 위치여서 그런지 운동하면서 나의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바로 지적해준다. “야 그거 발 잘못 됐다. 이렇게 해라”하는 식이다. 자그마한 차이가 골키퍼의 실력을 좌우하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된다.
운재 형에게 많은 걸 배우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골키퍼는 포지션 특성상 실력이 거의 비슷해도 순간적인 판단이나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잘하는 선수와 못하는 선수가 구별되는데 운재형은 전체적으로 잔 실수가 없고 침착하며 경기 운영 능력이 뛰어나 좋은 모범이 된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
사실 지금이 가장 힘들다. 골키퍼는 실전에서 실력이 많이 늘기 때문에 게임을 많이 할수록 기량이 좋아진다. 그러나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교체할 필요가 거의 없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하루하루 엄청난 노력을 하는데 그만큼 인정받지 못할 때, 나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상대가 더 잘할 때, 내가 아무리 잘해도 상대가 더 잘 할 때면 안타깝고 아쉽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골키퍼는 그 팀에서 가장 잘 하는 사람이 출장하는 것 아닌가.
-팬북에서는 대학 2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되어 있던데.
대학교 때는 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운동이 너무 잘되니 심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사춘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 때 사춘기였나보다.
-선수 생활을 하다보면 위기의 때도 있는데.
군대 갔다가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을 했을 때이다. 골키퍼는 팔을 완전히 쭉 뻗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동작을 반복하다가 뼈가 닳아 그 부분을 수술을 통해 잘라냈다. 수술 후 재활 훈련하고 회복하는 일년 동안 몸무게가 30킬로그램이나 불어 충격을 받았다. 그 때“이제 축구 그만둬야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되겠다 싶어 육개월 동안 열심히 훈련해서 20킬로그램을 뺐다.
하지만 군 제대 후 수원으로 복귀했는데 내가 없던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밑에 있던 광수가 너무 잘하고 위로는 운재 형과 범철이 형이 있고. 나는 공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운동하다 중간에 구석에 가서 내가 운동을 그만둬야 하나보다 생각했다. 가장 열심히 하던 기간이기도 했지만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 6개월 동안 힘들게 운동하면서 중간중간 그라운드 구석에 가서 축구 그만둬야 되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 후 몸이 되돌아오고 코치가 가르치는 것을 몸이 받아들이게 되면서 덜 힘들어졌다.
-U-18 대표 선수로 선발된 경험도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인 92년에 18세 학생대표에 선발되어서 아시아학생선수권에서 입상했던 적이 있다. 대회 기간 동안 친구랑 한 게임씩 나눠서 골키퍼로 뛰었다. 그 때 동기는 지금 축구 안하게 되었지만. 당시 서동원, 안정환, 이상헌이 동기로 함께 학생대회 출전했었다. 대학교 2년 때에도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었는데 2달 동안 훈련하다가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하고 나왔다. 당시 팀에 골키퍼로는 이운재, 서동명이 있었다.
-아직도 대표팀 욕심이 있겠다.
기회가 되면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있는 것 아닌가. 나도 월드컵대회에 뛰고 싶다.
-골키퍼가 아니었으면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있었다는 아쉬움이 들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지 않다. 골키퍼가 아니었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 같다. 경기할 때는 필드 플레이어들에게 많이 뛸 것을 요구하는 편이지만 막상 훈련시 미니 게임을 하면서 필드 플레이로 나서면 정말 힘들고 어렵더라. 골키퍼가 천직이라 생각한다. 골키퍼만큼 재미있는 포지션이 없다. 공을 막으면서 하늘을 난다는 느낌도 들고 공이 손에 딱 잡힐 때 기분은 너무 좋다.
기다리면 때는 온다
-수원에 입단하게 된 계기는?
당시는 드래프트로 입단하게 되어 있어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었다. 영선이가 드래프트 1순위였고 내가 2순위로 입단하게 되었다. 사실 수원에는 골키퍼 자원이 너무 많아서 오고 싶지 않았다. 박철우, 이운재,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용병, 광수, 그리고 그 외에 2명이 더 있었다.
당시 골키퍼 전력이 약한 전북, 대전, 부산 같은 뛸 수 있는 팀에 가고 싶었다. 지금 말한 팀 드래프트 상황을 신문사를 통해 알아보니 1, 2차 어디에도 없어 떨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수원 입단을 희망했던 친구(대전의 강정운)가 수원 드래프트 상황을 알아보다 되었다고 알려줬다.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지만 대학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많이 설레었다.
-98년에 입단했으면 중견고참인데.
현재 팀 내에서 내 위로 형들이 없다. 수원의 분위기가 나이 어리나 많으나 상관없이 제 일만 잘하면 되는 분위기이지만 내가 처음 입단하던 시절에는 형들하고 눈도 못 마주쳤다. 지금은 열일곱살짜리 아이들도 서정원 선생님과 농담을 하는 정도이니 분위기도 많이 변한 것 같다. 내가 입단할 때 윤성효 선생님이 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때 볼보이하면서 아저씨라고 불렀던 분이었다. 입단 후 형이라고 부를 수도 형님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호칭을 정하지 못해 고민했던 생각이 난다. 차범근 감독님이 오시면서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지금은 선후배가 친구처럼 지낸다.
-수원은 각급 대표팀에 뛰었던 선수도 선발로 출장하지 못할 만큼 선수층이 두텁다. 골키퍼의 경우는 특수한 포지션이어서 교체도 힘들다. 특히 국가대표 이운재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선발로 출장해 케이리그 출전 기회가 많지 않다. 힘들지 않은가?
욕심은 크게 없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면 한 두 번 기회는 오는데 그 때 나 때문에 팀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각오로 생활한다. 그런 기회에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감독이 예쁘게 봐서 한 경기 더 뛰게 해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한 게임 뛰게 해줄 때마다 정말 목숨 건다는 생각 밖에 없다.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내가 뛸 때 이겨야 한다 생각도 강하다. 올 시즌 5승 6무, 7실점 했다. 벤치에서 게임을 볼 때도, 준비할 때도 늘 팀과 함께 한다는 생각이다. 연습할 때는 더 열심히 해서 게임을 뛰면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몸에 익히려 노력한다.
-전후기 정규리그 합해서 2번 선발 출장했다. 출전 기회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원으로서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해 중요한 고비였던 지난 울산전, 원정이었던 부산전에서 멋진 선방으로 모두 무실점 승리를 챙겼다. 실전에서 뛰지 않으면 경기 감각이 많이 떨어진다고 말했는데, 멋진 활약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진다는 생각은 안해봤고 이긴다는 자신감 때문에 이긴 것 같다. 개인적으로 준비도 많이 했다. 운재형의 대표팀 스케줄이 나와 있어서 한 달 전부터 그 게임에 맞춰 준비를 했다.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훈련했다.
자신 있게 경기에 임할 수 있는 비결은 배짱인 것 같다. 수원에 입단한지 벌써 7년째다. 내가 나가서 지면 어떡하지 하면서 긴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믿고 열심히 한다. 내가 먹는 골은 남들도 먹는 것이고, 남이 먹는 골을 나는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만큼 준비를 하니까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무모할 정도로 배짱이 있다. 경기장 밖에서는 그렇지 않다. 남들이 얼굴만 봐도 피하니까. 운전하다 시비를 가리는 상황이 되어도 창문 열고 “죄송하다” 그러면 상대가 바로 “아무것도 아니다”며 그냥 간다(웃음)

경기에 임할 때면 두둑한 배짱으로 멋진 활약을 보여온 김대환 골키퍼/PawPhoto
-경찰청에 입대한 이유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하는 팬들도 있는데. 경찰청 생활이 도움이 되었는가? 조재진의 경우 상무 생활이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운재형이 입대한 1년 뒤 가게 되었다. 당시 김호 감독님한테 2년만 더 있다 군에 간다고 간청했었으나 “널 위해서”라며 입대를 강권했다. 당시 운재형이 제대할 때 가고 싶다고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강희 선생님과 함께 가서 좀 있다 간다고 설득했는데 끝내 실패했다. 운재형이 없었기 때문에 뛸 수도 있고 경기 감각도 좋아서 더욱 가기 싫었다. 입대한 후 “내 인생의 가장 큰 실패는 이 시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 갔다 온 것이 정말 잘한 것 같다.
군에 있는 기간 동안 시간이 있어서 수술을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 그 전까지는 여름철되어 운동량이 많아지면 고질적으로 팔이 아파 병원에 다녔다. 연중행사처럼 닥터도 너무 많이 괴롭혔다.
-전남 김영광의 경우 83년생, 부산 김용대의 경우 79년생이다. 모두 후배인데도 불구하고 팀에서 선발로 출장한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혹시 조바심이 나지는 않는지?
골키퍼는 실력 뿐 아니라 운도 따르기 마련이다. 조바심을 가지면 내가 망가진다. 운재형 군대 가기 전 3년 동안 리저브로 따라다니다가 군대 가고 나서 1년 주전으로 뛰었다. 지난해 1년 동안은 범철형이 있었기 때문에 리저브도 안되었고 올해 들어 겨우 리저브로 뛰게 되었다. 욕심도 욕심이지만 조바심은 나를 망가뜨린다.
선수가 경기에 출전하는 것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내가 몸이 좋은데 왜 안 뛰게 해주나”하면서 조바심을 내면 나 자신을 망가뜨리게 된다.
-득도의 계기가 있었나?
2000년 풀게임을 뛰게 되면서 너무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내 밑에 박호진이 있었는데 그 전의 나와 똑같은 처지였다. 호진이가 아무리 출전하기를 원해도 내가 다치지 않으면 못 뛰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못뛰게 되는 상황을 보면서 사람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수원에서는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가?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 저 놈은 항상 열심히 하고 기회가 주어지면 자기 몫은 한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내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수원은 국내 최대의 서포터를 가지고 있어서 힘을 얻을 때도 많은 것 같다.
골대에 섰을 때 뒤에 그랑블루가 있으면 많은 힘이 된다. 위치가 바뀌어 상대편 서포터 앞에 서면 우리 서포터의 중요성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서울이나 수원에서 가까운 곳으로 원정 경기를 갈 때 우리 서포터가 더 많으면 우리의 홈 같아 더욱 신이 난다.
-골키퍼의 종류도 다양하다. 국내만 봐도 개성이 강한 김병지와 자신의 색깔은 최대한 감추고 자신의 역할만 묵묵히 수행하는 이운재가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다양할 것 같다. 본인이 추구하는 골키퍼상은?
나는 기본적으로 운재형 같은 스타일이 맞는다. 다만 운재형보다 좀 더 대담해지고 활동 영역도 더 넓히고 싶다. 하지만 나는 병지형 같은 스타일은 절대 안된다. 병지형처럼 스피드도 안 되고 공도 그만큼 잘 차지 못한다. 병지형 같은 능력이 있으면 그런 선수가 되고 싶기도 하다.
-본인이 생각하는 골키퍼로서의 장점은?
차라리 단점을 말하라면 쉬운데 장점을 말하라니 참 어렵다. 사실 골키퍼가 장점이라면 상대가 슈팅 때릴 때 상대보다 더 잘 막고 골 안 먹는다고 해야 하는데 골 안 먹는 골키퍼는 없고.
내가 밝히는 단점이라면 킥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골키퍼의 경우 볼을 놓고 킥하는 경우와 들고 킥하는 경우가 있는데 들고 하는 킥은 잘하겠는데 놓고 차는 킥이 잘 안된다. 요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너무 연습을 해서 발목에 무리가 갈 정도다. 최근에는 골키퍼의 킥도 매우 중요해졌다. 골키퍼의 킥에 따라서 골을 넣을 수도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골키퍼의 킥은 공격의 시작되므로 킥의 개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올 시즌 챔피언을 꿈꾸며
-전기리그를 4위로 마치고 후기리그 들어 2연패하면서 꼴찌까지 추락했을 때의 팀 분위기는 어땠는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모두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 마음은 정말 그렇지 않았다. 정말 한 게임 더 졌으면 큰 일 날 뻔했다. 고작 12게임을 하는데 초반 2연패를 당했으니 어마어마한 위기였다. 2연패 후 이겼으니까 지금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 정말 그 때 상황은 편치 않았다. 아마 오늘도 인터뷰도 하지 못하고 오후에 운동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분위기를 추스르고 선두까지 오는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차범근 감독님이 감정을 많이 자제하면서 팀 분위기를 좋은 쪽으로 유도해주어서 팀의 사기가 더 많이 가라앉지 않고 상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팀의 주장인 이병근 선배와 서정원 선생님이 선수들과 자발적인 미팅을 갖고 해결책을 모색한 것도 팀 분위기를 추스르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이제 후기리그 5경기가 남았다. 대구 원정 경기를 앞둔 선수들의 분위기나 의지는 어떤가?
앞으로 남은 5경기에서 전승하고 우승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나도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팀을 위해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운재형도 요즘 대표팀에서 복귀해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운동장에 나가서 게임 못 뛰어도 항상 내 이름을 불러줘서 고맙다. 경기 시작 전 운동장에 나가서 훈련하고 있으면 내 이름을 불러주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운재형이 입대한 1년 뒤 가게 되었다. 당시 김호 감독님한테 2년만 더 있다 군에 간다고 간청했었으나 “널 위해서”라며 입대를 강권했다. 당시 운재형이 제대할 때 가고 싶다고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강희 선생님과 함께 가서 좀 있다 간다고 설득했는데 끝내 실패했다. 운재형이 없었기 때문에 뛸 수도 있고 경기 감각도 좋아서 더욱 가기 싫었다. 입대한 후 “내 인생의 가장 큰 실패는 이 시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 갔다 온 것이 정말 잘한 것 같다.
군에 있는 기간 동안 시간이 있어서 수술을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 했다. 그 전까지는 여름철되어 운동량이 많아지면 고질적으로 팔이 아파 병원에 다녔다. 연중행사처럼 닥터도 너무 많이 괴롭혔다.
-전남 김영광의 경우 83년생, 부산 김용대의 경우 79년생이다. 모두 후배인데도 불구하고 팀에서 선발로 출장한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혹시 조바심이 나지는 않는지?
골키퍼는 실력 뿐 아니라 운도 따르기 마련이다. 조바심을 가지면 내가 망가진다. 운재형 군대 가기 전 3년 동안 리저브로 따라다니다가 군대 가고 나서 1년 주전으로 뛰었다. 지난해 1년 동안은 범철형이 있었기 때문에 리저브도 안되었고 올해 들어 겨우 리저브로 뛰게 되었다. 욕심도 욕심이지만 조바심은 나를 망가뜨린다.
선수가 경기에 출전하는 것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내가 몸이 좋은데 왜 안 뛰게 해주나”하면서 조바심을 내면 나 자신을 망가뜨리게 된다.
-득도의 계기가 있었나?
2000년 풀게임을 뛰게 되면서 너무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내 밑에 박호진이 있었는데 그 전의 나와 똑같은 처지였다. 호진이가 아무리 출전하기를 원해도 내가 다치지 않으면 못 뛰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못뛰게 되는 상황을 보면서 사람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수원에서는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가?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 저 놈은 항상 열심히 하고 기회가 주어지면 자기 몫은 한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내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수원은 국내 최대의 서포터를 가지고 있어서 힘을 얻을 때도 많은 것 같다.
골대에 섰을 때 뒤에 그랑블루가 있으면 많은 힘이 된다. 위치가 바뀌어 상대편 서포터 앞에 서면 우리 서포터의 중요성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서울이나 수원에서 가까운 곳으로 원정 경기를 갈 때 우리 서포터가 더 많으면 우리의 홈 같아 더욱 신이 난다.
-골키퍼의 종류도 다양하다. 국내만 봐도 개성이 강한 김병지와 자신의 색깔은 최대한 감추고 자신의 역할만 묵묵히 수행하는 이운재가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다양할 것 같다. 본인이 추구하는 골키퍼상은?
나는 기본적으로 운재형 같은 스타일이 맞는다. 다만 운재형보다 좀 더 대담해지고 활동 영역도 더 넓히고 싶다. 하지만 나는 병지형 같은 스타일은 절대 안된다. 병지형처럼 스피드도 안 되고 공도 그만큼 잘 차지 못한다. 병지형 같은 능력이 있으면 그런 선수가 되고 싶기도 하다.
-본인이 생각하는 골키퍼로서의 장점은?
차라리 단점을 말하라면 쉬운데 장점을 말하라니 참 어렵다. 사실 골키퍼가 장점이라면 상대가 슈팅 때릴 때 상대보다 더 잘 막고 골 안 먹는다고 해야 하는데 골 안 먹는 골키퍼는 없고.
내가 밝히는 단점이라면 킥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골키퍼의 경우 볼을 놓고 킥하는 경우와 들고 킥하는 경우가 있는데 들고 하는 킥은 잘하겠는데 놓고 차는 킥이 잘 안된다. 요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너무 연습을 해서 발목에 무리가 갈 정도다. 최근에는 골키퍼의 킥도 매우 중요해졌다. 골키퍼의 킥에 따라서 골을 넣을 수도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골키퍼의 킥은 공격의 시작되므로 킥의 개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올 시즌 챔피언을 꿈꾸며
-전기리그를 4위로 마치고 후기리그 들어 2연패하면서 꼴찌까지 추락했을 때의 팀 분위기는 어땠는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모두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 마음은 정말 그렇지 않았다. 정말 한 게임 더 졌으면 큰 일 날 뻔했다. 고작 12게임을 하는데 초반 2연패를 당했으니 어마어마한 위기였다. 2연패 후 이겼으니까 지금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 정말 그 때 상황은 편치 않았다. 아마 오늘도 인터뷰도 하지 못하고 오후에 운동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분위기를 추스르고 선두까지 오는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있는가?
차범근 감독님이 감정을 많이 자제하면서 팀 분위기를 좋은 쪽으로 유도해주어서 팀의 사기가 더 많이 가라앉지 않고 상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팀의 주장인 이병근 선배와 서정원 선생님이 선수들과 자발적인 미팅을 갖고 해결책을 모색한 것도 팀 분위기를 추스르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이제 후기리그 5경기가 남았다. 대구 원정 경기를 앞둔 선수들의 분위기나 의지는 어떤가?
앞으로 남은 5경기에서 전승하고 우승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나도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팀을 위해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운재형도 요즘 대표팀에서 복귀해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운동장에 나가서 게임 못 뛰어도 항상 내 이름을 불러줘서 고맙다. 경기 시작 전 운동장에 나가서 훈련하고 있으면 내 이름을 불러주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스포츠인터렉티브 이상용